[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김영하작가가 시칠리아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낌 감정들과 인문학적 지식까지 담은 여행에세이다. 소설도 많이 썼지만 나는 김영하작가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소설은 조금 다크하고 딥한 느낌이라면 에세이는 그보다 경쾌하고 자유롭다. 김영하작가의 에세이에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어머 무시하게 드러난다. 가끔 놀랍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까지 입체적일 수 있을까. 작가가 쓴 다른 여행 에세이 [여행의 이유]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은 스마트폰 없이 떠난 마지막 여행 기록이라 더 특별해
내가 처음 자유여행으로 해외여행을 한 것은 2010년이었다. 이전에 해외여행을 한 적은 있지만 여행사 패키지였다. 2010년은 아이폰이 나오고 스마트폰이 대중적으로 이용되던 시기였다. 아날로그를 선호해서 지도와 일정표, 예약 내역등을 프린트해 종이로 가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길을 찾을 때, 여행지를 검색할 때, 숙박 예약을 할 때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김영하 작가가 시칠리아를 여행하던 시기엔 구글맵도 트립어드바이저도 호텔스 닷컴도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상상이 안 간다. 호텔예약은 물론이고 길도 잃고 정확한 날씨도 알 수 없었단다. 그럼에도 작가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고생스러운 여정에서 여행을 떠나왔음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대신 자신의 감각과 직관에 의존해 낯선 삶을 헤쳐나갔다고. 그 경험과 촉감이 [오래 준비해온 대답]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오래 준비해온 대답] 속 좋았던 문장들
장편소설을 일다 시작하고 나면, 그리고 고 세계가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빠져나와 일상을 마주하기가 점점 싫어진다. 일상은 어지럽고 난감하고 구질구질한 반면 소설 속의 세계는 언어라는 질료로 견고하면서도 흥미롭게 축조되어 있다.
소설은 작가가 모든 설정을 철저히 기획하고 쓴 것이기에 정확한 질서를 가지고 움직일 수 밖에 없다. 현실은 소설과 다르다. 일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 투성이다.
나는 이미 그것의 일부였다. 수백만 년 전 내 발밑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 지각변동이 이 섬과 저 건너의 불카노를 만들었다. 지도만 보고 무시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런 자각이 내게 상상하지 못했던 쾌감을 주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상황을 맞닥뜨리는 일은 꽤 흥미롭다. 나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인지 알게 되는 것은 슬프지만 놀라운 일이며 쾌감이 느껴지는 일이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나에겐 절대 잊을수 없는 어떤 풍경, 그것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어떤 감동 같은 것.
편안한 집과 익숙한 생활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뜨는 야성을 잃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꽤 오랫동안 편안함과 익숙함에 길들여진 생활에 파묻혀 살았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이 나의 성장은 주춤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고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모험을 시작했다. 다른 모든 책들이 그렇듯 내가 새롭게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김영하작가의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 영향을 끼쳤다.
모든 여행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작된다
김영하작가는 책 출간에 앞서 이렇게 표현했다. "여행은 세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 여행을 계획하고 상상하면서 한 번, 실제로 여행을 해나가면서 또 한번, 그리고 그 여행을 기억하고 기록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작가는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재출간하면서 아직 그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모든 여행은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작된다고. 나의 여행도 그랬으면 좋겠다. 언젠가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작되길.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는 동안 마치 시칠리아를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여행뿐 아니라 깊은 통찰을 감히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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